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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맛

파김치가 됐다? 무슨 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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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치고 기운이 없어 푹 늘어진 모습을 보고 우리는 ' 파김치가 됐다'라고 말한다.

일상생활에서 자주 쓰는 표현이라 별생각 없이 말하는 것이지만, 왜 하필 피곤한 모습을 파김치에 비유한 것일까?


올 봄에 담근 파김치

싱싱한 파는 꼿꼿하게 힘이 들어가 있다. 다듬어 놓아도 뻣뻣하다.

옛날 사람들은 그래서 파를 파릇파릇 생기 넘치는 식물의 표본으로 여겼다.
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선 모습을 울창하다고 하는데 강조법으로 울울창창이라고 한다.
그런데 울울총총이라고 하기도 하나 이것은 파가 무성하게 나 있다는 의미이니 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선 모습을 파에다 비유한 것이다.

그래서 옛 시인은 짙푸른 녹음을 푸른 파에다 빗대어 청총이라고 노래했고, 이런 표현이 은유적으로 발전해 청총은 푸른 파처럼 젊은 청년을 뜻하는 말로 쓰였다.


한입 드실래요?
파 부침개
뒤집어서 익혀주세요~


파는 이렇게 청춘의 상징이었는데 이런 파를 소금에 절여 양념까지 해서 파김치로 담그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렇게 생기 넘치고 꼿꼿하던 파가 문자 그대로 축 늘어져서 파김치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다른 어떤 채소로 담근 김치 재료보다도 김치를 담가놓기 전과 후의 모습이 달라진다.
'파김치가 됐다'는 표현이 그래서 생긴 것이 아닐까 싶다.


정조 때 규장각 검서관을 지낸 실학자 이덕무의 <청장관전서>에 피곤한 모습을 파김치에 빗대어 묘사한 표현이 보인다.

" 다리에 힘이 없어 마치 파김치처럼 늘어졌다"고 했는데 조금 더 부연 설명하자만 다리에 힘이 풀려 부들부들 늘어진 모습을 파김치와 비슷하다고 했다. 김치를 담그기 전까지 그렇게 꼿꼿하던 파가 김치를 담그자 부들부들 부드러워지는 것에 비유한 것으로 짐작된다.
이에 앞서 18세기 초반까지 살았던 권상하도 자신의 문집인 <한수재집>에다 큰 병을 앓은 후 기력이 꺾여서 글을 몇 줄만 읽어도 영락없이 파김치가 된다는 소회를 적어놓았다.

우리 조상님들은 언제부터 파김치를 담갔을까?

현재까지 찾아본 기록으로는 조선 초기, 서거정의 <동문선>에 파를 데쳐서 국을 끓이고 김치를 담근다는 표현이 있다.
따라서 늦어도 고려 말 이전부터 파김치를 담갔을 것이고 그러니 고려 때에도 피곤한 모습을 '파김치가 됐다'라고 표현했을 가능성도 있다.

왜 하필 파김치 일까?

조선시대 초반까지만 해도 지금과 같은 배추김치는 존재하지 않았다.
통배추는 조선 중후반기에 등장했기 때문이다. 반면 얼갈이 배추는 파처럼 처음에는 뻣뻣했다가 소금에 절이면 푹 늘어지는 채소가 아니다.

게다가 조선 초기만 해도 배추김치보다는 무김치가 중심이었다.
주로 겨울에 먹는 동치미, 아니면 무를 소금에 절인 짠지 위주였을 것이고 혹은 순무를 재료로 해 담근 나박김치 종류였다.
또는 부추김치를 많이 담갔던 것으로 보이는데 부추는 소금에 절인다고 평소 모습과 달리 늘어지는 채소가 아니다.

그러니 부들부들 숨이 죽는 채소는 파밖에 없었으니 피곤해 늘어진 모습을 '파김치가 됐다'라고 표현한 것이 아닐까 싶다.
파김치 하나를 놓고 이런저런 상상의 날개를 펴보는 것 역시 나름 재미있다.

김치없인 못 살아 , 정말 못 살아.


음식으로 읽는 한국 생활사( 윤덕노 지음)을 읽고 발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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