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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맛

배춧국은 북촌 양반의 가을 별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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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해 질 무렵, 골목길에서 정신없이 뛰놀다 ' 아무개야 밥 먹어라 ' 라는 부름에 집으로 달려가면 밥상에 구수한 배춧국이 놓여 있었다. 골목길에서 향수를 느끼는 것처럼 배춧국을 먹으며 고향 서울의 맛을 떠올리는 사람도 적지 않을 듯싶다.



토장을 풀어 넣고 끓인 된장국에 속이 꽉 차게 영근 배춧속을 넣어 푹푹 끓인 배춧국이 예전 가을철 서울의 별미였기 때문이다. 김장철이 지나면 일반 가정에서는 배추를 신문지에 싸서 보관했다가 배춧국을 끓였고, 예전 무교동의 배춧국은 청진동 선짓국 못지않게 서울의 한량들에게 해장국으로 이름을 떨쳤다.

그중 유명했던 것이 일제강점기에 나온 <해동죽지> 라는 책에서 조선 팔도의 별미 중 하나로 꼽은 효종갱이라는 배춧국이다. 지금은 낯선 이름이 된 이 배춧국은 경기도 광주의 남한산성 아랫마을에서 하루 종일 배춧국을 끓여 항아리에 담아서 밤새 한양으로 올려 보내면 새벽종이 울릴 무렵 북촌의 양반집에 도착했다고 해서 ' 새벽종이 울릴 때 먹는 국'이라는 뜻의
효종갱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국이 담긴 항아리 뚜껑을 열면 맑고 시원한 국물과 함께 건더기로 넣은 고기의 기름진 냄새가 먹음직스럽게 풍겨 나왔는데, 한양 북촌의 높은 벼슬아치 집에서 대놓고 먹었다고 해서 북촌갱이라고도 불렀다.
운송 수단이라고는 우마차밖에 없던 시절, 한양 북촌의 양반이 남한산성 아랫마을에 대놓고 먹은 국이라면 도대체 얼마나 맛있었을까?

< 해동죽지>에 있는 설명을 보면 음식 재료가 풍부한 지금 기준으로도 만만치 않다.
배추속대인 노란 고갱이를 주재료로 콩나물, 송이버섯, 표고버섯, 소갈비, 양지머리, 해삼과 전복을 넣고 토장을 풀어 하루 종일 끓인다고 했다. 이러니 지체 높은 양반집에서 질 좋은 배추가 나오는 가을 무렵, 광주의 농민들과 계약을 맺고 가을철 내내 이른 새벽마다 배춧국을 배달해 먹었던 것이다.

배춧국이 이렇게 서울의 별미로 발달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지금과 달리 옛날에는 서울과 경기도가 질 좋은 배추 생산지였기 때문이다.
남한산성 아랫마을인 경기도 광주에서 한양 북촌에 새벽마다 배춧국을 납품한 것도 그 때문이다.
특히 광주가 주요 배추 재배지였다.
이를테면 1950~ 1960년대 서울에서 팔리는 김장철 배추는 주로 경동시장을 통해서 공급됐는데 이곳 배추의 70%가 경기도 광주에서 재배한 것이었다.

옛날부터 한양은 배추의 주요 생산지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의 한성부에는 동대문 밖의 왕십리가 온통 배추밭이라고 했는데 특히 동대문근처의 훈련원 자리에서 키운 배추는 예전부터 왕실과 양반집에서도 웃돈을 얹어주고 샀을 만큼 품질이 뛰어났다고 한다.

서울에서 배춧국이 발달한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지금 기준으로 얼핏 생각하면 된장국에다 배추 잎사귀를 넣고 끓이는 배춧국은 고급스러울 것도 없으니 서민들의 음식이었을 것 같지만 오히려 반대였다. 배추가 흔한 채소가 아니었기 때문에 조선 초기만 해도 배추는 식용보다는 약용으로 쓰였다. 지금처럼 배추가 흔해진 것은 19세기 무렵부터인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니 배춧국 역시 돈과 권력이 몰린 한양을 중심으로 발달한 것이고, 들어가는 재료도 만만치 않아서 배춧국인지 고깃국인지 분간하기도 힘들 정도로 고급스러웠던 것이다.

물론 배춧국에도 종류가 여럿 있다.
된장을 체에 거른 후 쌀뜨물에 풀어 국물을 맑게 만들고 여기에 고기와 솎은 배추를 넣어 뭉근하게 끓인 배춧국도 있고,
가을철 속이 꽉 찬 배추의 노랗고 연한 속대를 넣고 끓인 토장 배춧국도 있으며 통장국에다 연한 배추 이파리만을 넣고 끓인 보통 배춧국도 있다.

한양 서민들의 밥상에 오르던 보통의 배춧국에서부터 북촌 양반들이 계절의 별미로 찾았다는 효종갱에 이르기까지
다양했으니 서울 사람이 배춧국에서 고향을 느낄 만하다.


음식으로 읽는 한국 생활사(윤덕노 지음)을 읽고 발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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